세포가 자기 역할을 잊으면 늙을까? 회춘 기술이 풀어야 할 질문
핵심 요약
- 세포 정체성은 간세포나 신경세포가 각자 맡은 일을 하며 그 역할을 유지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 정체성 손실이 노화를 일으킨다는 가설을 검증하려면 원인과 결과부터 구분해야 합니다.
- 부분 리프로그래밍은 세포가 원래 하던 일을 유지하면서 노화와 관련된 상태를 되돌리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 회춘을 입증하려면 나이 지표뿐 아니라 기능이 회복됐는지, 효과가 오래가는지, 안전한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간세포가 간세포답게 일하지 못한다면, 이를 노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세포 상태를 되돌리는 회춘 기술을 개발하려면 이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세포를 얼마나 젊게 만들 수 있는지와 함께, 그 과정에서도 원래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세포가 자기 역할을 잊는다는 말의 뜻
간세포와 신경세포는 대체로 같은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는 일은 크게 다릅니다. 어떤 유전자를 얼마나 쓰느냐에 따라 세포의 역할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를 유지하는 데 후성유전적 조절이 관여합니다. DNA 염기서열은 바꾸지 않고 유전자의 활동을 조절하는 방식입니다. 같은 업무 매뉴얼을 갖고 있어도 부서마다 펼쳐 보는 페이지가 다르다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세포 정체성은 세포의 역할과 그 역할을 유지하는 분자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간세포라면 대사와 해독 같은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유전자들이 계속 제 기능을 하도록 활동을 유지해야 합니다.
여기서 세포가 자기 역할을 ‘잊는다’는 말은 비유입니다. 세포에 기억이나 의식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정 세포가 제 역할을 하도록 유전자 활동을 조절하는 체계가 흐트러진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정체성을 잃어서 늙을까, 늙어서 정체성을 잃을까?
정체성을 잃어서 노화가 일어난다는 가설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세포가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조직의 기능도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설명이 그럴듯하다고 해서 원인까지 입증된 것은 아닙니다.
가능성은 최소한 세 가지입니다. 정체성 손실이 노화를 촉진할 수도 있고, 다른 손상이 먼저 쌓이면서 정체성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정체성 손실과 노화가 서로를 악화시킬 가능성도 생각해야 합니다.
어느 쪽인지 구분하려면 관찰만으로는 부족하고 실험이 필요합니다. 세포가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했을 때 노화에 따른 기능 저하가 줄어드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반대로 정체성을 흐트러뜨리면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노화에는 DNA 손상, 대사 변화, 염증 등 여러 과정이 얽혀 있습니다. 세포 정체성으로 이 과정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노화를 설명할 수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정체성이 달라졌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정체성 손실이 노화를 보여주는 흔적인지, 노화에 개입할 수 있는 원인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되돌리되, 원래 하던 일은 지켜야 합니다
후성유전적 리프로그래밍은 세포의 유전자 조절 상태를 다시 설정하는 방법입니다. 강한 리프로그래밍은 분화한 세포를 줄기세포와 유사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춘 치료에서는 이 성질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심장세포의 상태를 되돌리다가 심장세포로서의 성질까지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치료를 받은 뒤에도 심장세포는 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분 리프로그래밍이 주목받습니다. 리프로그래밍의 강도를 낮추거나 기간을 제한해 세포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노화와 관련된 변화를 되돌리려는 시도입니다. 다만 이는 기술이 이루려는 목표이며, 모든 세포에서 성공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디까지 되돌려야 할지도 정하기 어렵습니다. 세포 종류에 따라 반응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조직 안에 있는 세포들이라도 모두 똑같이 반응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정체성 손실을 노화의 원인으로 본다면, 리프로그래밍 과정에서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세포 상태를 바꿔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만큼, 그 과정에서 오히려 정체성이 더 흔들리지 않도록 조절해야 합니다.
나이 지표가 낮아졌다면, 정말 회춘한 걸까요?
노화 연구자 바딤 글라디셰프(Vadim Gladyshev)의 연구나 알토스 랩스(Altos Labs)의 세포 회춘 연구를 읽을 때도 실험에서 무엇을 측정했는지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후성유전 시계는 DNA 메틸화 같은 표지로 나이 또는 노화 관련 상태를 추정하는 도구입니다. DNA 메틸화는 DNA에 화학적 표지가 붙는 현상이며, 유전자 조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개입 후 시계가 더 젊은 값을 가리킨다면 눈여겨볼 만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 값만 보고 세포가 더 잘 일하거나 수명이 늘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측정에 쓰인 표지가 바뀌었다고 해서 생물학적 기능까지 회복됐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회춘 기술을 평가하려면 다음 세 가지도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 기능: 해당 세포와 조직이 실제로 제 역할을 더 잘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 지속성: 개입을 멈춘 뒤에도 좋아진 상태가 이어지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 안전성: 세포가 정체성을 잃거나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등의 문제가 생기지 않는지 평가해야 합니다.
세포 실험에서 나타난 변화가 동물의 건강 개선으로 이어지는지는 따로 검증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지 판단하려면 사람을 대상으로 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세포 정체성을 기준으로 삼으면 회춘으로 무엇을 이루려는지도 분명해집니다. 세포가 젊은 분자적 특징을 되찾으면서 자기 역할도 더 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물학적 나이를 되돌렸다’는 소식을 읽을 때도 같은 기준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나이를 나타내는 값이 얼마나 달라졌는지와 함께, 그 세포가 실제로 어떤 일을 더 잘하게 됐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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