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성도 기지국도 없이, HERMES는 어디까지 연결할 수 있을까
핵심 요약
- Rhizomatica의 HERMES는 단파 무선을 활용하는 오픈소스 통신 프로젝트입니다.
- 단파는 전리층을 이용해 위성이나 중간 기지국 없이 먼 곳까지 신호를 보낼 수 있습니다.
- 제한된 전송 용량에서는 사진과 영상보다 짧은 문자와 필수 정보를 우선해야 합니다.
- 통신 자립에는 소프트웨어뿐 아니라 전원, 안테나, 장비를 운영할 사람도 필요합니다.
인터넷이 끊기면 고화질 영상보다 “여기는 무사합니다”라는 한 줄이 더 급할 수 있습니다. 통신망이 닿지 않는 지역에서는 비상시뿐 아니라 평소에도 연락할 방법이 필요합니다. Rhizomatica의 HERMES는 단파 무선과 오픈소스로 이런 연결을 만들려는 프로젝트입니다.
기지국 대신 전리층을 거치는 연결
HERMES는 단파 무선을 바탕으로 합니다. 단파에 해당하는 HF는 3~30MHz 주파수 대역을 말합니다.
이 대역의 전파는 조건이 맞으면 지구 상공의 전리층에서 굴절돼 지표면으로 돌아옵니다. 전리층은 태양의 영향으로 전기를 띤 입자가 생기는 대기 영역입니다. 이 현상을 이용하면 지평선 너머의 먼 지역과도 통신할 수 있습니다.
위성으로 신호를 중계하거나 두 지역 사이에 기지국을 촘촘히 세우지 않아도 되는 셈입니다. HERMES는 이런 단파 무선으로 데이터를 주고받는 프로젝트입니다.
다만 “중간 기지국이 필요 없다”는 말과 “아무 장비도 필요 없다”는 말은 다릅니다. 양쪽에는 서로 통신할 수 있는 무선 장비와 안테나가 있어야 합니다. 장비를 가동할 전원도 필요합니다.
자연환경에 따라 연결 상태도 달라집니다. 시간대와 태양 활동에 따라 전리층의 상태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장비를 쓰더라도 언제나 같은 품질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통신 자립은 인터넷 접속과 어떻게 다를까
여기서 한 가지는 구분해야 합니다. 두 지점이 데이터를 주고받는 것과 인터넷 전체에 접속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외딴 마을과 다른 지역의 거점을 무선으로 이었다고 해보겠습니다. 두 곳 사이에 메시지를 전달할 통로는 생깁니다. 하지만 이 통로만으로 모든 웹사이트나 온라인 서비스에 접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외부 인터넷과 이어지려면 어딘가에 별도의 접속 경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HERMES를 “어디서든 평소처럼 인터넷을 쓴다”는 기대만으로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통신사업자의 망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직접 연락 수단을 마련하고 운영할 수 있다는 점을 봐야 합니다.
오픈소스라는 점도 여기에 도움이 됩니다. 소프트웨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고 필요한 기능을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역에서 쓰는 언어나 운영 방식에 맞게 바꾸는 일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코드를 공개해도 운영에 필요한 능력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습니다. 코드를 수정하고 관리할 사람이 있어야 실제로 고쳐 쓸 수 있습니다. 통신 자립에는 장비를 소유하는 것과 함께 운영할 능력도 필요합니다.
속도의 한계는 메시지의 우선순위를 바꿉니다
단파 데이터 통신에 스마트폰의 모바일 인터넷과 같은 속도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쓸 수 있는 대역폭이 제한돼 있고, 잡음이 끼거나 신호가 약해져 데이터를 다시 보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화면에 표시되는 순간 속도보다 필요한 정보가 전달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먼저 봐야 합니다. 연결 상태가 나쁘면 작은 메시지 하나를 보내는 데도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보내는 데이터의 크기에 따라 이 시간도 크게 달라집니다. 가령 짧은 문자가 1KB이고 사진이 1MB라면, 데이터량부터 약 1,000배 차이 납니다. 이는 HERMES에서 측정한 성능이 아니라, 같은 통신 경로로 무엇을 보낼지 판단하기 위한 예시입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서비스가 어떤 정보를 먼저 보낼지도 달리 정해야 합니다.
- 안부와 위치처럼 짧고 중요한 정보를 먼저 보냅니다.
- 재고나 요청 사항은 사진 대신 간단한 텍스트로 정리합니다.
- 즉시 답을 주고받기보다 답이 늦어져도 진행할 수 있도록 업무 방식을 정합니다.
의약품이 필요하다는 연락이라면 선반 전체를 촬영한 사진보다 품목과 수량을 적은 문장이 효율적입니다. 보내는 쪽과 받는 쪽이 간단한 양식을 미리 정해두면 메시지를 더 짧게 줄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설계한다고 통신 속도가 빨라지지는 않습니다. 대신 제한된 전송 용량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납니다. 단파 통신에서는 무엇을 보내고 무엇을 생략할지 정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연결을 직접 운영하면 유지보수도 내 일이 됩니다
통신 자립을 이야기하다 보면 설치한 뒤의 일을 놓치기 쉽습니다. 장비를 갖춰도 전원이 끊기거나 안테나가 손상되면 연결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외딴 지역에서는 고장 난 부품을 구하는 데도 시간이 걸립니다. 장비 상태를 확인할 사람과 수리 방법을 아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담당자 한 명만 운용 방법을 아는 일이 없도록 절차를 함께 공유해야 합니다.
HERMES 같은 통신망을 검토할 때는 “얼마나 멀리 연결되나”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먼저 누구와 연락하고 어떤 정보를 꼭 보내야 하는지 정해야 합니다. 그 정보가 얼마나 늦게 도착해도 괜찮은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기존 통신망이 있는 곳에서도 별도의 연락 경로를 마련할 이유는 있습니다. 다만 단파 장비 역시 전원과 안테나가 있어야 작동합니다. 비상시에 쓰려면 평소에도 실제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장비와 연결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HERMES를 검토할 때도 연결을 통해 무엇을 하려는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빠른 속도를 일부 포기하더라도 직접 운영할 수 있는 연락 수단이 필요한 곳은 있습니다. 인터넷이 끊겼을 때 가장 먼저 보내야 할 한 문장은 무엇일지, 그 내용을 정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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