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킹 없이 12TB가 열렸다, Steam2 ‘테라리크’는 보존일까 해적질일까
밸브의 옛 게임 유통 시스템에서 무려 12TB의 데이터가 쏟아졌다는 소식이 화제입니다. 비밀번호를 훔치거나 서버를 해킹해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논쟁은 한층 복잡합니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었던 자료를 모은 일은 보존일까요, 아니면 규모가 큰 불법 복제일까요.
Steam2에서 발견됐다는 12TB의 정체
Steam2는 지금의 스팀 콘텐츠 시스템이 자리 잡기 전에 쓰이던 구형 배포 체계입니다. 게임 본편과 업데이트 파일을 여러 묶음으로 나눠 전달했습니다. 이곳에는 출시 버전뿐 아니라 과거 패치와 개발 도구, 서버 파일 등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 거론된 자료는 12TB에 이릅니다. 일반적인 100GB급 대작 게임으로 환산하면 약 120개를 담을 수 있는 용량입니다. 단순한 문서 유출과 달리 과거 PC 게임의 실제 실행 파일과 변천 과정이 한꺼번에 드러났을 가능성이 있어 ‘테라리크’라는 표현까지 붙었습니다.
다만 아직 확인되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어떤 파일이 들어 있는지, 모두 정상적으로 실행되는지, 권리자가 누구인지는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2026년 8월 한 달 동안 새롭게 확인된 커뮤니티 논의도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12TB 전체가 밸브의 미공개 자산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공개 엔드포인트라면 해킹이 아닐까
핵심 쟁점은 자료를 공개 엔드포인트에서 수집했다는 주장입니다. 엔드포인트란 이용자의 요청을 받아 파일이나 정보를 돌려주는 서버의 접점입니다. 쉽게 말하면 잠긴 창고를 부순 게 아니라 열려 있던 배급 창구에 계속 요청을 보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행위가 저절로 정당해지는 건 아닙니다. 접근 장벽이 없다는 것과 복제·배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별개입니다. 서점 문이 열려 있다고 책을 마음대로 복사해 배포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기술적으로는 해킹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도 수집 과정에서 서비스 약관을 어겼거나 저작권이 있는 파일을 재배포했다면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특히 게임 본편과 상용 에셋이 들어 있다면 ‘공개된 주소에서 받았다’는 설명만으로 면책되기는 어렵습니다.
사라진 PC 게임 역사를 누가 지킬 것인가
이번 사건을 단순한 유출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는 디지털 게임 보존의 현실에 있습니다. 패키지 게임은 디스크가 남지만 온라인 유통 게임은 서버가 닫히면 원본을 구하기 어려워집니다. 업데이트가 거듭되면서 초기 버전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도 많습니다.
오래된 빌드에는 당시의 그래픽과 규칙, 삭제된 콘텐츠가 담겨 있습니다. 버그 수정 기록도 게임 개발사를 연구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영화의 초기 편집본이나 소프트웨어의 옛 소스 코드를 보존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문제는 권리자가 이 작업을 늘 맡아주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서비스가 종료된 게임은 수익을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관리 대상에서 밀려납니다. 회사가 문을 닫거나 인수되면 저작권의 주체조차 불분명해집니다. 팬과 연구자들이 비공식 보존에 나서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보존의 필요성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자료를 보관하는 것과 누구나 내려받을 수 있게 공개하는 것은 다른 행위입니다. 연구 목적으로 제한된 환경에서 열람하는 방식과 토렌트로 원본 전체를 배포하는 방식을 같은 선상에 놓기도 어렵습니다.
보존과 해적질을 가르는 기준
판단할 때는 ‘좋은 의도였는가’보다 실제로 어떻게 운영했는지를 따져야 합니다. 현재 판매 중인 게임이 포함됐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도 구매할 수 있는 콘텐츠를 통째로 배포한다면 보존보다 불법 복제에 가까워집니다.
접근 범위도 중요합니다. 게임 역사 연구자와 박물관에만 제한적으로 제공하는 것과 익명 이용자에게 전면 공개하는 것은 권리 침해의 규모부터 다릅니다. 암호화된 보관소에 저장하고 권리자의 요청에 대응하는 절차도 마련해야 합니다.
파일의 출처와 변경 이력도 남겨야 합니다.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얻었는지 알 수 없다면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도 떨어집니다. 악성코드나 변조된 실행 파일이 섞여 있을 위험도 있습니다.
현실적인 해법으로는 권리자와 보존 기관이 협력하는 디지털 납본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출시 버전과 주요 업데이트를 공공기관이나 신뢰할 수 있는 아카이브에 맡긴 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연구 목적으로 열람하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기업의 영업권과 사회의 기록 보존을 함께 고려할 수 있습니다.
밸브가 잃은 것은 데이터만이 아닙니다
공개된 접점에서 정말 12TB를 수집할 수 있었다면 밸브의 관리 책임도 가볍지 않습니다. 오래된 시스템을 방치하면 파일뿐 아니라 고객 정보나 인증 구조까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노출될 수 있습니다. 서비스 종료는 서버 전원을 끄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번 논쟁은 게임 산업이 보존을 팬들의 회색지대 활동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다는 사실도 보여줍니다. 공식적인 보존 경로가 없으면 누군가는 위험을 감수하고 자료를 복사합니다. 그러다 보면 역사 기록과 상용 콘텐츠가 뒤섞인 거대한 파일 더미가 만들어집니다.
12TB라는 숫자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디지털 게임이 문화유산이라면 누가, 어떤 권한으로, 언제까지 보관해야 할까요. 산업이 답을 미루는 동안 보존과 해적질의 경계는 계속 파일 공유 사이트에서 정해질지도 모릅니다.
댓글
댓글을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