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전기를 삼키는 시대, 미국은 1조 6천억을 들여 '풍력을 멈추는 데' 썼습니다
돈을 써서 발전소를 짓는 건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돈을 써서 발전소를 안 짓게 만드는 건 좀 낯설죠. 미국 정부가 독일 에너지 기업 RWE의 해상풍력 프로젝트를 중단시키는 대가로 12억 달러, 우리 돈 약 1조 6천억 원을 물어주기로 했습니다. 하필 지금은 AI 데이터센터가 전력망을 통째로 빨아들이는 시점인데 말이죠.
하나 미리 밝혀둡니다. 이번 건은 커뮤니티에서 시끄럽게 오간 이야기라기보다 정책이나 산업 쪽 뉴스로 흘러나온 사안이라, 세부 조건은 계약서가 공개되면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큰 그림은 충분히 읽을 만합니다.
왜 ‘짓지 말라’고 돈을 주는가
해상풍력은 착공 전에 이미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해저 지반 조사, 연방 임대권(리스) 확보, 인허가, 터빈 발주 계약, 케이블 부설 계약까지. RWE 같은 대형 사업자는 미국 동부 해안에 수년간 수십억 달러를 미리 부어놓은 상태였고요.
정부가 정책 방향을 틀어 사업을 멈춰 세우면 ‘취소’로 끝나지 않습니다. 계약 파기입니다. 사업자는 소송으로 갈 수 있고, 국제 투자자 보호 조항까지 끌어들이면 판이 커집니다. 그래서 나온 게 합의금이죠. 소송으로 몇 년 끌다 배상액이 더 불어나느니 지금 12억 달러로 정리하자는 계산입니다.
이 돈은 전기를 만드는 데 쓴 게 아닙니다. 이미 쓴 돈을 없던 일로 만드는 데 썼습니다. 회계상으로는 ‘정책 전환 비용’, 현실에서는 매몰비용 청구서고요.
같은 시기, 전력 수요는 어디로 가고 있나
여기서 모순이 시작됩니다. 미국 전력 수요는 지난 20년 가까이 거의 정체였습니다. 에너지 효율이 좋아지는 속도가 수요 증가를 상쇄했거든요. 그런데 이 흐름이 최근 몇 년 사이 완전히 깨졌습니다.
원인은 대체로 하나로 수렴합니다. AI입니다. 학습용 GPU 클러스터 하나가 소도시 하나만큼 전기를 먹고, 추론 서비스가 대중화되면서 그 부하가 24시간 상시로 깔립니다. 데이터센터 한 동의 계약 전력이 수백 메가와트 단위로 잡히는 게 이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전력회사가 신규 접속 대기열을 몇 년씩 밀어놓고 있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이유죠.
버지니아, 오하이오, 텍사스처럼 데이터센터가 몰린 지역은 이미 접속 지연과 요금 인상 압력을 동시에 겪습니다. 이번에 중단된 RWE 프로젝트가 겨냥하던 곳도 결국 동부 해안 수요지였습니다. 수요가 가장 급하게 늘어나는 지역의 공급 계획을 정부 돈까지 써가며 지운 셈입니다.
해상풍력이 미운 진짜 이유
정책 담당자들이 해상풍력을 접는 논리가 완전히 근거 없는 건 아닙니다. 대체로 세 가지가 걸립니다.
먼저 돈. 금리가 오르면서 해상풍력 프로젝트의 자금 조달 비용이 크게 뛰었습니다. 초기 계약 단가로는 수지가 안 맞으니 사업자가 재협상을 요구하거나 아예 손을 뗐고, 지난 몇 년간 그런 사례가 계속 나왔습니다.
간헐성도 있습니다. 바람은 24시간 일정하게 불지 않죠. 반면 AI 데이터센터는 밤낮 없이 일정한 부하를 요구합니다. “AI 시대에는 항상 켜져 있는 전원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원전과 가스 쪽에 힘을 실어주는 배경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정치입니다. 해상풍력은 어느새 특정 진영의 상징처럼 굳어졌습니다. 어업계와 해안 지역 주민의 반대도 꾸준했고요. 정권이 바뀌면 가장 먼저 손대기 좋은 대상이 됐습니다.
문제는 셋 다 맞는 말이라 해도 “그래서 대신 무엇을 지을 것인가"에 답이 같은 속도로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체재는 제때 오지 않습니다
가스 발전을 늘리면 되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 세계 가스터빈 제조사마다 주문이 밀려 있습니다. 새로 발주하면 인도까지 몇 년이 걸립니다. 원전은 더 심하고요. 소형모듈원자로(SMR)는 아직 상업 운전 실적이 얇고, 대형 원전은 착공부터 가동까지 10년 단위로 봐야 합니다.
해상풍력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인허가와 임대권을 이미 확보했고 터빈 발주까지 끝내뒀으니까요. 완공까지 남은 시간이 가장 짧은 선택지였다는 뜻입니다. 그 파이프라인을 지웠다는 건 2030년 전후에 들어왔을 전력이 그 시점에 없다는 얘기고요.
그 공백은 어디로 갈까요. 기존 화력의 가동률을 높이거나, 은퇴 예정이던 노후 발전소의 수명을 연장하거나, 아니면 데이터센터가 직접 자가발전을 짓는 쪽으로 갑니다. 대형 테크 기업이 원전 단독 계약이나 가스 자가발전을 검토한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전력망이 못 해주면 각자도생이 시작되죠.
진짜 비용은 12억 달러가 아닙니다
이번 합의금에서 진짜 문제는 금액이 아닙니다. 신호입니다.
미국에 대규모 에너지 인프라를 투자하려는 해외 자본 입장에서는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연방 임대권을 따고, 인허가를 통과하고, 수십억 달러를 집행해도 정권이 바뀌면 사업이 멈출 수 있다. 물론 보상은 받는다. 하지만 애초에 원한 건 보상이 아니라 발전소였습니다.
이런 학습이 쌓이면 다음 프로젝트의 요구 수익률이 올라갑니다. 리스크 프리미엄이 붙으면 전력 단가가 오르고, 그 비용은 소비자와 데이터센터 운영사가 나눠 냅니다. AI 인프라 경쟁에서 전기값과 확보 속도가 핵심 변수가 된 지금, 이건 에너지 뉴스인 동시에 테크 산업 뉴스입니다.
같은 정부, 반대 방향
한쪽에서는 AI 때문에 전기가 모자라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돈을 내고 발전 계획을 지웁니다. 두 결정이 같은 정부에서 나옵니다. 에너지 정책은 20년을 내다보고 짜야 하는데 정치는 4년마다 방향을 바꾸니까요.
AI 경쟁의 승부처가 모델 성능이 아니라 전기를 얼마나 빨리, 얼마나 싸게 확보하느냐로 넘어가고 있다면, 발전 계획을 정치 주기에 맡겨두는 게 맞을까요. 데이터센터를 유치하겠다는 나라는 전부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한국도 그중 하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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