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일하고 나는 복붙만 하는데, 이게 개발자가 맞나요
요즘 하루가 대체로 이렇게 흘러갑니다. 터미널에서 에러가 나면 그 로그를 통째로 복사해 AI 채팅창에 붙여넣습니다. 답이 나오면 그 코드를 다시 복사해 에디터에 붙여넣고 실행합니다. 또 에러가 나면 다시 복사. 이 왕복을 서른 번쯤 하고 나면 문제는 풀려 있는데, 정작 내가 오늘 뭘 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걸 부르는 말이 있습니다. 고기 프록시(meat proxy). AI와 시스템 사이에서 데이터를 실어 나르는 인간 중계기라는 뜻인데요.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이 단어가 유난히 아프게 박히는 건, 농담으로 넘기기엔 너무 정확한 묘사이기 때문입니다.
프록시가 된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가
네트워크에서 프록시는 요청을 받아 다른 곳에 전달하고 응답을 받아 다시 돌려주는 중계 서버입니다. 자기가 판단하지 않고 그냥 전달합니다. 그게 프록시의 존재 이유고 그래서 프록시는 얼마든지 갈아 끼울 수 있습니다.
고기 프록시는 그 자리에 사람이 앉아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AI가 “이 파일 내용을 보여줘"라고 하면 사람이 가서 열어 복사해 옵니다. AI가 명령어를 주면 사람이 터미널에 쳐서 결과를 다시 갖다 바칩니다. 하는 일은 분명 많은데, 그 일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판단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 상태가 꽤 바쁘고 꽤 생산적으로 느껴진다는 겁니다. 화면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커밋은 쌓입니다. 티켓도 닫히고요. 그런데 손으로 하는 일과 머리로 하는 일의 비율을 따져보면 어느새 손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 있습니다.
왜 이런 구조가 만들어졌나
기술적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초기 AI 코딩 도구는 대부분 채팅창이었습니다. 채팅창은 파일을 못 읽고 명령도 못 돌립니다. 결과를 확인할 방법도 없고요. 그러니 그 모든 걸 사람이 대신 해줘야 했습니다. 사람이 곧 AI의 입출력 장치였던 셈이죠.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에이전트형 도구는 파일을 직접 읽고 셸도 직접 돌립니다. 테스트까지 알아서 실행하고요. 복붙 왕복의 상당 부분은 이미 기술적으로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여전히 복붙을 하고 있는데요. 습관이 남아서이기도 하고, 도구에 권한을 넘기는 게 불안해서이기도 합니다. 회사 정책상 아예 못 하는 경우도 있고요.
여기서 갈림길이 생깁니다. 복붙을 줄이면 사람은 더 위쪽 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무엇을 만들지 정하고, 나온 결과가 맞는지 검증하고, 이 접근이 6개월 뒤에도 굴러갈지 판단하는 일 말입니다. 반대로 복붙만 줄이고 그 자리를 다시 복붙으로 채우면 더 빨라진 프록시가 될 뿐입니다.
“그럼 검토는 하잖아요"라는 반론
당연히 나오는 반론이 있습니다. 나는 AI가 준 코드를 읽고 검토한다고. 그러니까 단순 중계가 아니라고요.
맞습니다. 다만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속도가 붙을수록 검토는 성글어집니다. 하루에 코드 200줄을 받으면 꼼꼼히 읽습니다. 2000줄을 받으면 훑습니다. 20000줄을 받으면 테스트가 통과하는지만 봅니다. 그리고 도구가 좋아질수록 받는 양은 늘어납니다.
승인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도 프록시의 일부일 수 있다는 겁니다. 내용을 이해하고 통과시키는 것과 통과시켜도 별일 없더라는 경험이 쌓여서 통과시키는 것은 겉으로 구분이 안 됩니다. 스스로도 구분하기 어렵고요. 자동 승인은 설정 파일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 머릿속에도 생깁니다.
그래서 무엇이 남는가
이 논의를 “AI가 개발자를 대체하는가"로 끌고 가면 답이 안 나옵니다. 더 쓸모 있는 질문은 이겁니다. 내가 하는 일 중에서 기계가 못 하는 게 정확히 무엇인가.
몇 가지가 남습니다. 애초에 문제를 제대로 정의하는 일. 요구사항이 서로 모순될 때 어느 쪽을 포기할지 정하는 일. 이 코드가 실패했을 때 누가 얼마나 곤란해지는지 감을 잡는 일. 그리고 결과에 책임을 지는 일. 마지막 항목이 특히 중요한데요. AI는 배포한 서비스가 새벽 3시에 죽어도 호출을 받지 않습니다.
반대로 넘겨도 되는 일도 명확합니다. 보일러플레이트 작성, 문법 오류 수정, 로그 복사, 반복적인 리팩토링. 이런 걸 붙들고 있는 건 장인정신이 아니라 그냥 비효율입니다.
자가 진단 세 가지
거창한 대책보다 짧은 점검이 낫겠습니다.
첫째, 오늘 한 작업 중에서 내가 결정한 것을 세 개 말할 수 있나요. 결정이란 다른 선택지가 있었고 내가 그중 하나를 고른 걸 말합니다. 하나도 안 떠오르면 신호입니다.
둘째, AI가 내놓은 결과를 마지막으로 거절한 게 언제인가요. 거절해본 지 오래됐다면 검토가 아니라 통과 절차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셋째, 지금 하는 복붙 중에서 도구 설정만 바꾸면 사라질 것이 몇 퍼센트인가요. 그 부분은 지금 당장 없애도 됩니다. 사람이 굳이 할 이유가 없는 일이거든요.
마무리
고기 프록시라는 말이 불편한 건 그게 미래 예측이 아니라 현재 진단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고 있는 일에 이름이 붙었을 뿐이죠. 다만 이 말은 자책하라고 쓰는 게 아니라 구분하라고 쓰는 겁니다. 넘길 일과 쥐고 있을 일을 나누는 기준이면 됩니다.
기계가 못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프록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목록이 뭔지 한 번도 적어보지 않은 채로 하루하루 복사와 붙여넣기를 반복하는 상태입니다. 오늘 퇴근 전에 그 목록을 다섯 줄만 적어보면 어떨까요. 다섯 줄이 안 나온다면 그게 지금 손봐야 할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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