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3분 소요

AI 학습 데이터를 위해 희귀 도서를 재단합니다: '디지털화'라는 이름의 파괴

책을 스캔하려면 책등을 잘라야 합니다. 페이지를 낱장으로 분리해야 고속 스캐너에 넣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스캔이 끝난 종이 뭉치는 대부분 버려집니다. AI 기업이 학습 데이터를 모으면서 벌이는 일인데, 요즘 아카이브 업계와 도서관계가 여기에 조용히 화가 나 있습니다.

미리 밝혀둘 게 있습니다. 이 주제는 최근 30일간 커뮤니티 데이터에서 거의 잡히지 않았습니다. 리서치 결과가 사실상 비어 있었어요. 그래서 이 글은 실시간 여론 분석보다는 지난 몇 년간 쌓인 사실관계와 쟁점을 정리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쟁점이 식은 건 아니고요.

왜 굳이 책을 자르는가

비파괴 스캔 장비가 있는데 왜 자르느냐. 이 질문이 먼저 나옵니다. 속도와 비용 때문입니다.

책을 편 채로 위에서 찍으려면 사람이나 로봇 팔이 한 장씩 넘겨야 합니다. 책등 쪽 글자가 휘어져 들어가니 후보정도 해야 하고요. 제본을 잘라 낱장으로 만들면 문서 스캐너에 그냥 밀어 넣으면 됩니다. 분당 수백 페이지가 넘어갑니다. 수만 권을 처리해야 하는 쪽에서는 이 차이가 전부입니다.

대형 AI 기업이 중고 서적을 대량으로 사들여 재단하고 스캔했다는 정황은 2025년 저작권 소송에서 문서로 드러났습니다. 파괴적 스캔이 새로운 기법은 아닙니다. 개인 장서를 PDF로 만드는 이른바 ‘자炙’ 문화도 같은 원리고요. 문제는 규모입니다.

책을 사서 부수는 쪽이 더 안전하다는 역설

이 사안에서 제일 기묘한 대목입니다. 웹에서 불법 복제본을 긁어오면 될 텐데 왜 굳이 종이책을 사서 부술까요.

미국 저작권법의 최초판매원칙 때문입니다. 제값 주고 산 책 한 권은 주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습니다. 자르든 태우든 자유죠. 산 책을 스캔해서 형식만 바꾸는 것도 2025년 미국 법원 판결에서 공정이용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불법 사이트에서 받은 파일을 쓰면 그건 그냥 침해고요.

종이책을 사서 물리적으로 파괴한 뒤 디지털 사본을 남기면 합법에 가깝고, 파일을 내려받으면 위법입니다. 원본을 남겨두는 쪽이 법적으로 더 위험합니다. 법이 노린 결과는 아닐 텐데, 결과적으로 파괴를 부추기는 인센티브가 됐습니다.

‘어차피 중고책인데’라는 반론

이 관행을 옹호하는 논리도 나름 탄탄합니다. 잘리는 건 대개 대량으로 찍어낸 중고 도서입니다. 수천 부가 남아 있는 2003년판 경영서 한 권 자른다고 인류 문화유산이 사라지진 않습니다. 창고에서 썩을 책이 검색되는 텍스트로 남는 거라고 볼 수도 있고요.

문제는 선별의 부재입니다. 대량 매입은 상자 단위로 합니다. 그 안에 뭐가 섞였는지 일일이 확인하지 않습니다. 절판된 지역 향토사 자료, 소규모 출판사의 초판, 저자 서명본, 여백에 이전 주인의 메모가 빼곡한 책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사서들이 지적하는 핵심이 이겁니다. 희소성은 나중에야 판명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책에 텍스트만 들어 있는 게 아닙니다. 종이 재질, 인쇄 방식, 제본 형태, 광고 삽지, 장서인, 대출 기록. 서지학이 다루는 정보의 상당수는 스캔 이미지에 남지 않습니다. 스캔은 복제가 아니라 추출입니다. 필요한 것만 뽑고 나머지는 버립니다.

진짜 손실은 스캔이 아니라 그 다음

이 사안은 과장되어 도는 경우도 많습니다. AI 기업이 박물관급 고문서를 파쇄한다는 식의 주장은 확인된 바 없습니다. 잘려나가는 건 거의 전부 흔한 상업 출판물입니다. 분노가 엉뚱한 데를 겨누면 논의가 산으로 갑니다.

정작 걸리는 건 그다음입니다. 스캔한 데이터가 공개되지 않는다는 것. 구글 북스는 그래도 검색과 미리보기라는 형태로 일부나마 공공에 돌아왔습니다. AI 학습용 스캔 데이터는 기업 내부에 머뭅니다. 원본은 사라지고 사본은 비공개이고, 그 결과물인 모델도 대개 닫혀 있습니다.

물리적 원본을 소모해서 만든 자산이 사적으로만 쌓입니다. 도서관계가 실제로 걸고넘어지는 건 이 대목입니다. 파괴 자체보다 파괴의 대가가 어디로 가느냐가 쟁점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한가

현실적으로 요구할 만한 건 셋입니다.

하나, 재단하기 전에 걸러내는 절차. 희귀본 판별 기준을 세워두는 정도가 최소한의 성의입니다. 둘, 스캔이 끝난 원본을 버리지 말고 도서관이나 아카이브로 넘기는 것. 낱장이어도 보존 가치는 남습니다. 셋, 스캔 이미지 자체를 공공 아카이브에 기증하는 것. 학습에 쓴 텍스트를 내놓으라는 게 아니라, 이미 없애버린 원본의 디지털 흔적이라도 남기라는 요구입니다.

셋 다 비용이 듭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강제하지 않습니다.


책 한 권 사라지는 건 대단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수만 권이 텍스트로만 바뀌고 물성은 버려지는 일이 아무 기록 없이 굴러가면, 나중엔 뭘 잃었는지도 모릅니다. 잃어버린 것의 목록이 없으니까요.

기술을 밀고 나가는 것과 원본을 지키는 것 중에 하나만 고를 상황은 아닙니다. 지금은 그저 후자에 아무도 돈을 안 쓰고 있을 뿐입니다. 스캔이 끝난 그 종이 뭉치,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AI 저작권 디지털아카이브 데이터윤리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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