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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화산재에 묻힌 2000년 전 두루마리를 통째로 읽어냈습니다

요즘 AI 이야기는 대부분 챗봇이 글을 더 잘 쓰네, 그림을 더 잘 그리네 하는 쪽으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여기 결이 완전히 다른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AI가 사람이 물리적으로 펼칠 수조차 없던 2000년 전 두루마리를 읽어낸 겁니다. 손도 대지 않고요. 이건 “AI가 사람보다 잘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 아예 할 수 없던 일을 한다"는 이야기라 더 흥미롭습니다.

펼치면 부서지는 두루마리, 도대체 어떤 물건인가

서기 79년, 이탈리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합니다. 폼페이를 덮친 그 사건이죠. 그런데 폼페이 근처에는 헤르쿨라네움이라는 도시도 있었습니다. 이곳의 한 호화 별장에는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가득한 개인 서재가 있었는데요. 화산 폭발 당시 약 500도에 달하는 화산쇄설류가 이 서재를 덮쳤습니다.

보통 같으면 다 타버려서 재가 됐을 겁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산소가 차단된 상태에서 고온에 노출되다 보니, 두루마리들이 처럼 탄화된 채로 굳어버렸습니다. 종이가 사라진 게 아니라 까만 덩어리로 보존된 셈입니다.

문제는 이게 너무 약하다는 데 있었습니다. 18세기에 발굴된 이후, 학자들이 어떻게든 펼쳐 읽어보려고 했는데요. 손을 대는 순간 바스러졌습니다. 실제로 초기에 펼치려다 영영 잃어버린 두루마리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백 개의 두루마리가 “분명 글이 적혀 있는데 읽을 방법이 없는” 상태로 200년 넘게 방치돼 있었습니다.

손대지 않고 읽는다는 발상

여기서 나온 아이디어가 기발합니다. 펼칠 수 없다면 펼치지 말고 들여다보자는 거였죠.

먼저 의료용 CT 스캐너로 두루마리를 통째로 촬영합니다. 몸속을 들여다보듯 두루마리 내부의 미세한 층을 단면으로 찍는 겁니다. 입자가속기 수준의 고해상도 X선 촬영까지 동원됐습니다. 이렇게 하면 두루마리를 물리적으로 펼치지 않고도 둘둘 말린 내부 구조를 3D 데이터로 확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진짜 벽이 시작됩니다. 스캔 데이터에는 글자가 안 보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쓰던 잉크가 탄소 기반이었기 때문인데요. 파피루스도 탄화돼서 탄소, 잉크도 탄소입니다. X선 입장에서는 같은 재질이라 글자와 배경이 거의 구분되지 않습니다. 까만 도화지에 까만 펜으로 쓴 글씨를 어둠 속에서 읽으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머신러닝이 들어온 지점

바로 이 지점이 AI가 진짜 일을 한 곳입니다.

연구진은 잉크가 있는 자리와 없는 자리의 X선 신호 차이가 아주 미세하게 존재한다는 데 주목했습니다. 사람 눈에는 안 보이지만, 그 미세한 패턴을 머신러닝 모델에게 학습시킨 거죠. “이런 미세 신호가 보이면 잉크 자리다"라고 모델이 분별하도록 훈련한 겁니다.

순서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3D 스캔 데이터에서 말려 있는 파피루스 한 겹 한 겹을 가상으로 분리합니다. 이걸 ‘가상 펼치기’라고 부르는데요. 컴퓨터 안에서 두루마리를 디지털로 펴는 작업입니다. 둘째, 펼쳐낸 평면 위에서 머신러닝이 잉크의 흔적을 찾아냅니다. 셋째, 그 흔적들이 모여 글자가 되고, 문장이 되고, 마침내 사람이 읽을 수 있는 텍스트가 됩니다.

이게 바로 베수비오 챌린지의 핵심입니다. 전 세계 연구자와 개발자들에게 데이터를 공개하고 상금을 걸어, 누가 먼저 글자를 읽어내는지 경쟁시킨 프로젝트인데요. 2023년 첫 단어가 읽혔고, 이후 문단 단위로 읽히더니, 이제는 두루마리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읽어내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무엇이 적혀 있었나

읽어낸 내용도 흥미롭습니다. 초기에 해독된 두루마리에서는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 학파와 관련된 철학 텍스트가 나왔습니다. 쾌락과 음악, 음식이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따지는 내용이었죠. 2000년 전 어느 지식인이 고민하던 주제가 갑자기 우리 눈앞에 펼쳐진 셈입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요. 헤르쿨라네움 서재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문헌이 통째로 보존된 사실상 유일한 도서관입니다. 우리가 아는 고대 문헌 대부분은 후대 사람들이 베껴 쓰고 또 베껴 쓴 사본을 통해 전해졌는데요. 이 두루마리들은 그 시대에 직접 쓰인 원본에 가깝습니다. 아직 읽지 못한 두루마리가 수백 개 남아 있고, 발굴되지 않은 별장 구역에는 수천 개가 더 묻혀 있을 거란 추정도 있습니다. 그 안에서 영영 사라진 줄 알았던 고대의 명작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게 진짜 AI의 승리인 이유

요즘 AI를 둘러싼 회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럴듯한 말을 지어내고,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고, 결국 사람 일을 빼앗는 것 아니냐는 우려죠. 충분히 일리 있는 걱정입니다.

그런데 이 사례는 결이 다릅니다. AI가 사람의 일을 대체한 게 아닙니다. 사람이 200년 동안 못 하던 일을 해낸 겁니다. 펼치면 부서지는 두루마리 앞에서 인류는 정말 답이 없었습니다. AI는 사람을 밀어낸 게 아니라, 사람의 눈이 닿지 못하던 미세 신호의 영역을 대신 봐준 셈입니다.

게다가 이건 환각이 끼어들 여지가 적은 작업입니다. 머신러닝이 잉크 패턴을 잘못 짚으면 글자가 말이 안 되니, 학자들이 곧바로 검증할 수 있습니다. AI가 후보를 제시하고 인간 전문가가 판독하는, 협업의 모범 사례에 가깝습니다.

한 가지 짚어둘 점은, 이 주제가 지난 한 달 사이 커뮤니티에서 뜨겁게 논의되는 실시간 화제는 아니라는 겁니다. 관련 유튜브 영상 몇 개가 꾸준히 올라오는 정도인데요.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생성형 AI 열풍 속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AI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챗봇 데모보다, 2000년의 침묵을 깬 이 조용한 성취가 어쩌면 더 본질적인 진보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AI가 “사람보다 잘하는 것"과 “사람이 아예 못 하던 것을 해내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인상적이신가요? 다음에 사라진 고대 문헌 하나가 통째로 복원됐다는 뉴스가 들려온다면, 그건 더 이상 공상이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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