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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자국 연구자에 '해외 공동 논문 발표 금지' 카드 만지작 — 과학 협력의 시대는 정말 끝나는가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2026년 미국에서 이 명제가 본격적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자국 연구자가 해외 공동 연구자와 논문을 발표하는 행위 자체에 정부가 제한을 두기 시작했다는 신호가 잇따르고 있는데요. 단순한 규제 강화가 아니라, 지난 80년간 미국이 주도해온 개방형 과학 모델의 종언을 알리는 분기점일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핵심은 이렇습니다. 미국 연방 연구비를 받은 과학자가 특정 국가의 연구자와 공동 논문을 낼 때, 사전 신고와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절차가 강화되고 있다는 겁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기술 유출 방지인데요. AI, 반도체, 양자컴퓨팅, 바이오 등 이른바 ‘중요 기술(critical technology)’ 분야에서 미국이 쌓아온 우위가 공동 연구를 통해 새어 나간다는 우려가 깔려 있습니다.

문제는 그 범위입니다. 처음에는 군사 전용 기술에만 적용되던 통제가, 이제는 기초 과학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 학계의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한 미국 대학 교수의 말을 빌리면 “어제까지 같이 논문 쓰던 동료에게 오늘부터는 메일도 조심해서 보내야 한다"는 상황입니다.

왜 지금인가 — 차이나 이니셔티브의 그림자

2018년 시작됐다가 2022년 공식 종료된 차이나 이니셔티브(China Initiative)를 기억하실 겁니다. 중국계 미국 과학자들을 대거 기소했다가 무죄율이 너무 높아 결국 폐지된 프로그램인데요. 폐지됐을 뿐, 그 정신은 다른 이름으로 부활하고 있다는 게 학계의 진단입니다.

올해 들어 미국 국립과학재단(NSF)과 국립보건원(NIH)은 연구비 지원 조건에 ‘외국 연계 공시 의무’를 대폭 강화했습니다. 단순한 공동 연구 이력뿐 아니라, 학회 발표, 객원 교수 활동, 심지어 비공식 메일 교신까지 보고 대상에 포함된다는 가이드라인이 돌고 있습니다. 위반 시 연구비 환수는 물론 형사 처벌까지 가능한 구조입니다.

학계의 반응 — “냉전보다 더 차갑다”

흥미로운 건 미국 내부의 반발입니다. 미국과학진흥회(AAAS)를 비롯한 주요 학술 단체들은 일제히 우려 성명을 내고 있는데요. 핵심 논리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미국 과학의 경쟁력 자체가 개방성에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MIT나 스탠퍼드 같은 대학의 박사과정생 절반 이상이 외국인이고, 노벨상 수상자 상당수가 이민자 출신입니다. 문을 닫는 순간 자국 손해라는 겁니다.

둘째, 과학 자체의 작동 원리를 거스른다는 점입니다. 현대 과학은 국제 공동 연구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CERN의 입자물리학 실험, 기후 모델링, 신약 임상 시험 모두 수십 개국이 데이터를 공유해야 굴러갑니다. 한 분자생물학자는 “냉전 시대에도 소련 과학자와 논문은 같이 썼다"며 지금이 더 폐쇄적이라고 토로했습니다.

한국에는 어떤 영향이 있을까

남의 일이 아닙니다. 한국 대학과 연구소의 상당수가 미국 기관과 공동 연구를 진행 중인데요. 특히 AI, 반도체, 바이오 분야는 미국이 가장 예민하게 보는 영역과 정확히 겹칩니다.

당장 우려되는 시나리오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미국 연구자가 한국 측에 데이터 공유를 망설이게 되면서 공동 논문 발표가 지연되는 경우입니다. 둘째, 한국 박사후과정 연구원이 미국 랩에 가더라도 핵심 프로젝트에서 배제되는 상황입니다. 셋째, 한국 기업이 미국 대학과 산학협력을 맺을 때 기술 이전 조건이 훨씬 까다로워지는 변화입니다.

이미 일부 한국 교수들은 미국 공저자가 “이 부분은 빼고 발표하자"고 요청하는 사례를 겪고 있다고 합니다. 논문 한 편 내기가 외교 협상이 되고 있는 셈입니다.

디커플링의 끝에 무엇이 있나

긴 호흡으로 보면, 이번 변화는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과학 세계의 진영화를 의미합니다. 미국 중심의 서구 진영과 중국 중심의 또 다른 진영이 데이터, 인재, 출판 시스템을 따로 갖는 시대로 가고 있는 거죠. 이미 중국은 자국 학술 데이터베이스인 CNKI를 키우고 있고, 러시아는 서구 저널 구독을 사실상 끊은 상태입니다.

문제는 인류 공통의 문제 — 팬데믹, 기후 변화, 식량 안보 — 가 진영 구분 없이 닥친다는 점입니다. 코로나19 백신이 그렇게 빨리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중국 연구진이 1월에 바이러스 유전체 서열을 즉시 공개한 덕분이었습니다. 그런 협력이 가능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면, 다음 위기에는 어떻게 대응할까요.

과학의 국경화는 단기적으로 안보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모두를 더 가난하고 더 위험하게 만드는 길일지 모릅니다. 한국처럼 중간에 낀 나라는 더더욱, 이 변화의 끝이 어디인지 깊이 들여다봐야 할 시점입니다.

과학정책 미중갈등 연구보안 학술협력 테크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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