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부가 팔란티어를 버린 이유 — '디지털 주권' 선언이 의미하는 것
영국 정부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내무부(Home Office)가 그동안 난민 신청 처리에 써오던 팔란티어(Palantir) 기반 시스템을 폐기하고, 내부에서 직접 만든 소프트웨어로 갈아탔다는 소식입니다. 빅테크에 의존하던 정부가 “이젠 우리가 만들겠다"고 말한 셈인데요, 이게 왜 단순한 IT 교체 뉴스가 아닌지 차근차근 풀어보겠습니다.
팔란티어가 영국 공공 부문에서 차지하던 위치
팔란티어는 그동안 영국에서 꽤 큰 존재감을 가졌습니다. NHS(국민보건서비스) 데이터 플랫폼 계약을 3억 3천만 파운드 규모로 따냈고, 국방·정보기관과도 오랜 협업 관계를 이어왔죠. 내무부의 난민 처리 시스템 역시 그 연장선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의존도가 점점 불편한 그림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한 회사가 보건, 국방, 이민 데이터를 모두 다루게 되면 정보 비대칭이 생깁니다. 정부가 자기 데이터를 가지고도 정작 그 데이터를 어떻게 다루는지는 외부 벤더에게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거죠.
왜 하필 지금 갈아탔을까
타이밍을 보면 우연이 아닙니다. 최근 몇 년간 유럽 전반에서 “디지털 주권(Digital Sovereignty)“이라는 단어가 정치권 의제로 올라왔습니다. 미국 빅테크에 핵심 인프라를 맡기는 게 안보·외교적으로 리스크라는 인식이 퍼지면서요.
특히 팔란티어는 창업자 피터 틸의 정치적 행보, 미국 정부 기관과의 밀착, 그리고 데이터 처리 방식의 불투명성 등으로 영국 시민단체와 노동당 의원들로부터 꾸준히 비판받아 왔습니다. 난민 데이터처럼 인권에 직결된 정보를 외국 사기업이 다루는 게 적절하냐는 질문이 계속 따라붙었죠.
내부 개발이 던지는 진짜 메시지
여기서 흥미로운 건 “다른 벤더로 갈아탔다"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영국 정부가 정부디지털서비스(GDS, Government Digital Service)를 중심으로 내부 개발 역량을 키워온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게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한번 자체 개발 트랙으로 들어가면 그다음 시스템도 내부에서 만들 가능성이 커집니다. 둘째, 다른 정부들에게 “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다는 점입니다. 독일, 프랑스가 이미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영국 사례가 가속페달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에 시사하는 점
한국도 공공 부문 클라우드·AI 인프라를 어디에 맡길 것인가를 두고 비슷한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AWS냐, 네이버클라우드냐, 자체 구축이냐. 이번 영국 사례는 “벤더 락인(vendor lock-in)을 풀려면 결국 내부 기술 인력에 투자해야 한다"는 교과서적 결론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줍니다.
다만 자체 개발이 만능은 아닙니다. 유지보수 인력, 장기적 인재 확보, 보안 패치 속도 등 빅테크가 잘하는 영역을 정부 조직이 그대로 흉내 내기는 어렵습니다. 영국이 이 시스템을 5년, 10년 뒤에도 잘 굴리고 있을지가 진짜 시험대일 겁니다.
마치며
이번 결정은 단순히 “팔란티어 빠이"가 아니라, 정부가 자기 데이터의 주인으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빅테크가 만들어둔 편리한 길에서 내려와 직접 길을 내겠다는 선택은 비용도, 시간도 더 들지만 한번 만들어두면 협상력이 완전히 달라지죠.
여러분이 다니는 회사, 혹은 한국 공공 부문은 어떤가요? 편리함을 위해 내준 자리가, 나중에 돌려받기 어려운 자리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쯤 점검해볼 만한 타이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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