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원전 폐쇄를 멈추다 — AI 시대 유럽 에너지 정책의 대전환
벨기에가 결국 결단을 내렸습니다. 2003년부터 법으로 못 박았던 원전 단계적 폐쇄 정책을 공식적으로 뒤집은 건데요. 단순히 정책 하나가 바뀐 게 아닙니다. AI 시대가 유럽의 에너지 지형을 어떻게 다시 그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23년 만에 뒤집힌 탈원전 약속
벨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일찍, 가장 강하게 탈원전을 외쳤던 나라 중 하나입니다. 2003년 녹색당 주도로 통과된 법은 모든 원전을 2025년까지 닫는다는 내용이었는데요. 도엘(Doel) 1·2호기와 티앙주(Tihange) 1호기는 이미 폐쇄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의회가 통과시킨 새 법안은 단순한 가동 연장이 아닙니다. 탈원전 자체를 폐기하는 내용입니다. 신규 원전 건설 가능성까지 열어둔 것이 핵심인데요. 23년 전의 정치적 합의가 완전히 무너진 셈입니다.
결정타는 결국 AI 데이터센터였다
왜 지금일까요. 답은 명확합니다. 전력 수요가 미친 듯이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 전역에서 데이터센터 신설 러시가 벌어지고 있는데요.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이 벨기에와 인접 국가에 잡아놓은 데이터센터 부지만 따져도 향후 5년간 수 GW급 추가 전력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AI 모델 학습과 추론에 들어가는 전력은 기존 클라우드 서비스와 비교가 안 되는 규모인데요.
벨기에 정부가 내세운 명분도 비슷합니다. 전력 안보, 탄소 감축 목표, 그리고 산업 경쟁력입니다. 재생에너지만으로는 폭증하는 베이스로드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현실적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유럽 전체로 번지는 도미노
이건 벨기에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독일이 2023년 마지막 원전을 폐쇄한 이후 유럽 에너지 정책의 시계추는 빠르게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데요.
프랑스는 신규 원전 6기를 발표했고, 영국은 SMR(소형모듈원자로) 본격 도입을 추진 중입니다. 폴란드, 체코, 네덜란드도 신규 원전 계획을 줄줄이 내놨습니다. 심지어 이탈리아도 1987년 국민투표로 닫았던 원전 카드를 다시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블룸버그의 에너지 권위자 다니엘 예긴이 최근 팟캐스트에서 “전혀 다른 세계가 등장하고 있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호르무즈 위기 이후 에너지 안보가 다시 최우선 의제가 됐고, 여기에 AI 전력 수요까지 겹치면서 원자력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진 거죠.
그러나 풀어야 할 숙제도 산더미
물론 박수만 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신규 원전 한 기를 짓는 데 보통 10년 이상, 비용은 100억 유로를 훌쩍 넘기는데요. 핀란드 올킬루오토 3호기는 13년 지연됐고, 영국 힝클리 포인트 C도 일정과 예산이 계속 밀리고 있습니다.
기존 원전 수명 연장도 간단치 않습니다. 노후 설비 안전 점검, 우라늄 공급망 재편, 사용후 핵연료 처리 문제까지 풀어야 할 숙제가 많습니다. AI 데이터센터는 당장 내년에 전력이 필요한데, 원전은 빨라야 2030년대 중반에야 가동되는 시간차도 큰 문제인데요.
에너지 패러다임은 다시 그려지고 있다
벨기에의 결정은 단순한 정책 변경이 아닙니다. 지난 20년간 유럽 에너지 담론을 지배해온 “재생에너지 100%” 비전이 현실의 벽에 부딪힌 신호이기도 합니다. AI라는 거대한 전력 블랙홀이 등장하면서, 모든 가용한 저탄소 전원을 끌어모아야 하는 시대가 온 거죠.
이제 질문은 이겁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데이터센터가 수도권에 몰리고, AI 산업 육성을 외치면서, 동시에 안정적인 전력 공급은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지. 벨기에가 던진 화두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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