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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테크가 EU 법에 몰래 심은 '비밀 조항' — 데이터센터의 진짜 환경 비용은 왜 가려졌나

AI 붐이 시작된 뒤로 데이터센터는 조용히 전기와 물을 빨아들이는 블랙박스가 됐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블랙박스를 열어볼 수 있어야 할 EU의 법안에, 빅테크 로비스트들이 슬쩍 심어놓은 한 줄짜리 ‘비밀 조항’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습니다. 환경 규제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공개를 막는 장치였던 셈인데요.

문제의 조항은 정확히 무엇인가

발단은 EU의 에너지효율지침(EED)입니다. 2023년 개정된 이 지침은 500kW 이상 규모의 데이터센터에 대해 전력소비량, PUE(전력사용효율), 물 사용량, 재생에너지 비중 등을 매년 보고하도록 의무화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투명성을 크게 끌어올리는 조치였죠.

그런데 시행령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영업비밀(commercially sensitive information)에 해당하는 경우 공개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이 끼어 있었던 것이죠. 문제는 ‘영업비밀’의 범위가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인 수치 대신 “우리 운영 노하우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면 그대로 넘어갑니다.

누가 이 문구를 집어넣었나

유럽 탐사보도 매체들과 환경단체가 법안 협상 문서를 추적한 결과, 해당 예외 조항을 밀어붙인 주체가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메타로 구성된 업계 로비 그룹이었다는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이들은 “경쟁사가 전력·냉각 설계를 역추적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는데요.

하지만 속내는 다릅니다. 아일랜드에서 데이터센터가 국가 전력의 21%를 쓰고 있고, 네덜란드·독일에서도 지역 상수원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치달은 상황에서, 구체적 숫자가 공개되면 신규 부지 허가와 세제 혜택 협상에서 여론이 뒤집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미 아일랜드에서는 데이터센터 신규 허가 중단 논의가 정치 쟁점이 되어 있습니다.

‘공개된’ 보고서가 공개가 아닌 이유

더 교묘한 건 보고 체계입니다. EU 집행위원회는 각 데이터센터가 제출한 자료를 집계된 형태로만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즉, 특정 회사의 특정 시설이 얼마나 쓰는지는 알 수 없고, “유럽 전체 데이터센터 평균 PUE는 1.58” 같은 추상적 숫자만 남는 것이죠.

환경단체들은 이걸 두고 “수치는 있는데 책임질 주체가 없는 보고서"라고 비판합니다. 특정 시설이 지역 상수원을 고갈시키고 있어도, 어느 회사 소유인지 특정할 수 없으면 주민들은 소송도, 항의도 할 수 없습니다. 정보 비대칭을 법적으로 제도화한 셈입니다.

AI 시대, 숫자가 가려지면 무엇이 가려지나

문제는 2026년 들어 AI 인프라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더 커지고 있습니다. GPT-5급 모델을 돌리는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 한 곳의 전력 수요는 소도시 하나 수준입니다. 냉각에 쓰이는 물은 하루 수백만 리터에 달하고요. 이런 숫자가 ‘영업비밀’로 묶이면, 지역 주민과 정책 입안자 모두 AI의 실제 환경 비용을 계산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지점은 ‘탄소중립 선언’의 신뢰성입니다. 빅테크들은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를 쓰겠다고 공언해왔는데요. 구체적 시설별 데이터가 없으면 이 약속이 실제로 지켜지고 있는지 검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린워싱을 가려낼 도구 자체가 법으로 무력화된 셈입니다.

앞으로의 흐름

유럽의회 내부에서는 2026년 하반기 EED 재개정 논의에서 이 예외 조항을 손질하자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습니다. 녹색당과 일부 사민당 의원들이 “시설 단위 공개 의무화"를 추진 중이고요. 반면 빅테크 측은 이번에도 “경쟁력 훼손"을 근거로 버티는 중입니다.

한국에서도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카카오·네이버의 신규 데이터센터 논의가 이어지는 가운데, 국내에는 애초에 전력·물 사용량 공개 의무 자체가 없습니다. EU의 사례는 “제도를 만들어도 빈틈이 있으면 결국 비슷한 결과"라는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무엇을 물어야 하나

기술 기업들이 “혁신을 위해서는 비밀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 그 비밀이 정말 알고리즘을 지키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환경 영향을 숨기기 위한 것인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AI가 똑똑해질수록 그 뒤에서 돌아가는 물리적 인프라는 더 커지고,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내뿜습니다. 그 숫자를 볼 권리는 누구에게 있을까요. 그리고 그 권리를 법으로 제한하는 게 정말 ‘영업비밀’의 영역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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